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앙겔로스 왕조 (문단 편집) === [[이사키오스 2세]](1185~1195) === [[알렉시오스 1세]]의 딸 테오도라와 결혼한 후 유력한 장군으로서 중용받은 콘스탄티노스 앙겔로스의 손자이자 안드로니코스 두카스 앙겔로스의 6남이다. 그는 1185년 자신을 잡으려든 [[안드로니코스 1세]]의 심복 스테파노스 하기오크리스토포리테스를 엉겁결에 죽인 뒤, [[아야 소피아]]로 피신했다가, 안드로니코스의 폭정에 폭발한 시민들의 추대로 황위에 올랐다. 당시 [[시칠리아 왕국]]군이 트라키아까지 쳐들어왔는데, 황제는 [[알렉시오스 브라나스]]에게 전권을 맡기고 남은 병력을 지원군으로 보내며 격려했다. 제국군은 브라나스의 지휘하에 전열을 정비한 뒤, 시칠리아군을 마케도니아로 밀어냈다. 시칠리아군이 강화를 제의했지만, 브라나스는 묵살하고 총공격을 가해 시칠리아군을 괴멸시켰다. 이후 이사키오스는 헝가리 왕 벨라 3세의 딸을 자신의 두번째 아내로 맞이하고, 여동생을 몬페라토 공국에 시집 보내는 등 외교 관계 회복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시칠리아군과 전쟁을 벌이면서 재정이 휘청거리자, 비용 마련을 위해 불가리아에 무거운 세금을 매기고 장정들을 징집했으며, 심지어 새로 황후를 맞아들인 뒤 결혼 축의금을 마련하라는 명분으로 특별세를 부과했다. 여기에 [[매관매직]]을 공개적으로 벌였고, 이를 통해 관직을 얻어낸 자들이 본전을 뽑으려고 민중을 수탈하면서 날로 약화되었고 자연히 민심은 점차 황실로부터 등을 돌렸다. 또한 이사키오스 2세는 서방인들을 총애해 그들에게 갖가지 이권을 부여했고 서방인들은 이러한 황제의 총애를 등에 업고 동로마인들을 괄시했다. 결국 제국 내에서 동로마인과 서방인간의 갈등은 날이 갈수록 악화되었다. 1185년 불가리아의 귀족 토도르 페터르와 아센 형제는 이사키오스 2세에게 세금 경감과 자치권, 그리고 세금을 내는 데 필요한 수도원 수입을 받기 위해 하이모스 산 근교의 토지를 하사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사키오스 2세는 거부했고, 황제의 삼촌인 [[요안니스 두카스(세바스토크라토르)|요안니스 두카스]]는 아센의 얼굴을 때리며 요구가 너무 무례하다고 꾸짖었다. 형제는 메시아로 돌아간 뒤 반란을 꾀했지만, 동료들은 쉽사리 그들을 따라 제국에 맞서려 하지 않았다. 그해 여름, 살로니카의 성 디미터르의 이콘이 터르노보에서 발견되었다. 이에 토도르와 아센 형제는 성 디미터르가 불가리아를 돕기 위해 살로니카를 포기했다고 선언했다. 그들은 이를 명분으로 삼아 제국에 반기를 들었고, 가혹한 징세에 시달리던 민중이 대거 호응했다. 불가리아 제1제국의 수도였던 프리슬라프에는 상당 규모의 제국군이 주둔하고 있어서 즉시 점령할 수 없었기에, 반군은 타르노보에 새로운 수도를 세웠다. 토도르는 차르만이 사용하던 휘장을 채택하고 자신을 [[페터르 4세]]로 자칭했고, 아센 역시 [[이반 아센 1세]]로 칭했다. 이사키오스는 친히 군대를 이끌고 반란 진압에 나서 반란군을 다뉴브 강 이북으로 밀어냈고, 성 디미터르의 이콘을 탈취했다. 그러나 아센 형제는 다뉴브 강 이북에서 [[쿠만족]]과 연합하여 재차 공세를 개시, 이전의 영토를 되찾았을 뿐만 아니라 모이시아 전역까지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 이에 황제는 반란 진압을 군사에 밝은 삼촌 요안니스 두카스에게 맡겼고, 요안니스는 반란군을 상대로 여러 번 승리했다. 그러나 황제는 요안니스 두카스가 반란을 꾀하고 있다고 의심해 경질하고 처남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를 지휘관에 선임했다. 칸타쿠지노스는 불가리아 반란군 토벌에 착수했으나 매복에 걸려 대패하고 말았다. 이에 이사키오스 2세는 패전의 책임을 물어 그를 해임하고 알렉시오스 브라나스를 선임했다. 그러나 브라나스는 부하들의 추대로 황제를 자칭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했다. 황제의 또다른 처남 몬페라토의 콘라드가 브라나스를 격파해 반란을 막아낼 수는 있었지만, 그 사이에 불가리아 반란군은 입지를 확고히 다져놓았다. 이후 제국은 반란군과 맞붙어 몇차례의 작은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험한 산지와 쿠만족의 도움을 받은 반란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하는 데 실패했고 결국 1187년에 평화협정을 체결해 2차 불가리아 제국을 사실상 인정했다. 1187년 10월, [[살라흐 앗 딘]]이 기독교의 성지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 이에 [[제3차 십자군 원정]]이 결성되었고, 1189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신성 로마 제국)|프리드리히 1세]]가 대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을 시작했다. 프리드리히 1세는 이사키오스에게 협조를 요구했지만, 이사키오스는 그가 불가리아와 손을 잡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할 지도 모른다고 판단해 비협조적인 자세로 대했고 급기야 살라흐 앗 딘과 극비리에 군사 협정을 체결하기까지 했다. 이 정보가 새면서 프리드리히 1세의 귀에 들어가자 양측의 갈등은 점차 고조되었다. 그래도 예루살렘으로 얼른 갈 생각만 하고 있던 프리드리히 1세는 이사키오스 2세에게 사절을 보내 "제국에 위해를 가할 생각은 없으니 아군이 예루살렘으로 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그런데 이사키오스는 인질로 삼아 버렸다. 이에 격노한 프리드리히는 즉시 디디모티코를 점령하는 한편 대규모 함대로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할 준비에 착수했다. 이사키오스 2세는 프리드리히 1세의 강경한 반응에 당황하여 인질로 삼았던 사절을 돌려보내고 용서를 구하는 한편, 보스포러스 해협 대신 콘스탄티노플에서 좀더 떨어진 다르다넬스 해협으로 병력을 이동시킨다면 협조할 용의가 있다고 제안했다. 이에 프리드리히 1세는 이를 수락하고 1189년 겨울을 동로마 제국 내에서 월동한 뒤 1190년 5월 다르다넬스 해협을 지나 소아시아로 진격했다. 1190년, 이사키오스는 불가리아와의 전쟁을 재개하여 타르노보를 포위했다. 그러나 수개월에 걸친 공격에도 요새는 함락되지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쿠만족 지원군이 근접했다는 소식까지 전해졌다. 이에 이사키오스 2세는 전의를 상실하고 철수했다. 그러나 페터르 4세의 아우 아센이 트랴브나에 매복해 있다가 이사키오스 2세의 동로마군을 습격했고, 황제는 군대와 자금, 황제관과 황복을 죄다 내팽개치고 홀로 도주했다. 이로 인해 동로마 제국은 다시 일어서기 힘들 정도의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이후 페터르, 아센 형제는 쿠만족과 함께 동로마 제국의 영역을 잇달아 공격하여 바르나와 포모리를 약탈하고 트리아디사를 파괴했으며, 불가리아의 성인인 이반 릴스키의 유물을 확보했다. 1192년, 이사키오스 2세는 사촌 [[콘스탄티노스 앙겔로스 두카스]]를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트라키아에서 불가리아 약탈부대를 격파했다. 그러나 그는 반란을 일으켰다가 아드리아노폴리스에서 진압되어 실명형에 처해졌다. 1193년, 아센은 형 페터르와 함께 트라키아를 침공했다. 이사키오스 2세는 알렉시오스 기도스와 바실리오스 바티치스를 파견했지만, 형제는 이들을 아르카디오폴리스 전투에서 섬멸하고 폴로브디프를 포함한 트라키아의 일부 지역을 공략했다. 1195년 4월 8일, 킵셀라에서 군대를 소집해 트라키아를 탈환하기 위한 원정을 준비하던 중, 형 [[알렉시오스 3세]]에게 붙잡혀 실명형에 처해지고 감옥에 갇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